숙연한 마음으로 눈물을 삼키게 되는 지하 무덤 지하 교회 카타콤
히브리서 11: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저는 이번 사도 바울의 이탈리아 로마 여정 탐방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가 옛 지하 무덤 카타콤이었습니다 (사진들 참조). 우리가 방문한 카타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기원전 고대 로마 시대부터 지하무덤 시설은 존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파리에서도 발견되는 고대 무덤 시설입니다. 로마 시내 뿐 아니라 이탈리아 전역 고대 도시마다 수 많은 지하 무덤이 개인묘지, 가족묘실 (특히 부자들의 화려하고 웅장한), 그리고 이름없는 일반인들이 묻힌 공동묘지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카타콤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 하다고 하는데, 구글 지도를 찍은 사진이 바로 우리가 방문한 세바스찬 카타콤 (사진 바닥 중간)이고 맨 위 왼쪽 모서리가 베드로 사도가 핍박을 피해 로마를 떠나던 중 오히려 로마를 향해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쿼바디스 도미네 (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지점 (성당 십자가 표시)에서 약 1,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이 사진 중간부터 우측 전체 대부분 언덕 지역의 지하가 바로 로마의 대표적인 카타콤 묘지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는 이 지하무덤 카타콤 속의 미로들 가운데 100분의 1 분량도 되지 않는 한 부분을 걸으면서, 그곳이 단순한 지하 무덤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지하 무덤 속으로 숨어들어갔던 옛 성도들의 흔적들을 보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숙연해지고 안타까와지는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이 없으면 칠흙같이 어두운 공간, 지금도 퀴퀴하고 습한 냄새와 어두운 미로 속에서 손만 잘못 뻗으면 금새 인골이라도 만져질 것 같은 섬찟함. 그 어두운 미로 중간 중간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 만의 표시를 하고 구획을 짓고 방화벽 혹은 쫓아오는 로마병정들을 막고 혼란에 빠뜨리기 위한 시설들과 마침내는 제법 넓은 예배실까지 은밀하고 깊숙한 지하 공간에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서,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이란 바로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 지하 무덤 속에 숨어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로마 병정들이 들어왔다가, 그 가운데 어떤 병사들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가 탈진을 하여 죽기도 하고, 또 어떤 병사들은 그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구조를 받고 도움을 받아 박해자에서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 변화되는 일들도 많이 일어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안내자를 따라 꼬불꼬불, 오르락 내리락 지하 수십미터까지 들어갔을 때, 놀랍게도 제법 큰 예배당이 나타났습니다. 바닥에서 천정까지 높이가 약 6-7미터가 되고 이 예배당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는 사방에 작은 계단들로 이어지는데, 각 방향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또 다시 미로가 시작되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다가도 침입자 소리가 들리면, 급히 도망을 갈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지하 거주 지역들은 대부분 소박하고 비좁게 형성이 되어 있었으나, 곳곳에 당시 박해 속의 기독교인들이 서로를 확인하고 간단한 의사소통을 위해 고안한 각 종 암호와 성경 내용을 담은 벽화들이 많았습니다.
한편 믿지 않는 일반 로마 시민들의 가족묘실들도 그리 멀지 않은 이웃 구역에 위치해 있었는데, 부자들의 묘실은 지하에 마치 오늘 날의 공원묘원의 화려한 가족묘실 처럼 넓고 광대한 대리석 집이 지하에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그런 가족 묘실들이 여럿 갖춰진 지하 구역의 중앙에는 성묘를 온 가족들이 둘러 앉아 음식을 먹으며 휴식할 수 있는 넓은 공간과 시설들까지 갖추어져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지하 무덤 및 시설을 전문적으로 파고 설비하는 직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과연 로마에 갔고, 그곳에서 순교를 하였는가?
이제 사도 베드로 선생님의 로마 교회 사역과 순교에 관하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로마에서의 사도 바울의 행적보다 사도 베드로의 행적과 순교를 절대적으로 부각 시켜놓았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님은 로마에 가는 모든 여정과 첫 도착 후 2년 간의 생활과 사역까지 자세히 사도행전 28장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에 관해서는 사실 성경말씀에 명확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로마 카톨릭교회 (구교회)는 바울 사도보다 오히려 베드로를 로마교회의 머리, 곧 전 세계 교회의 수장으로 만들었을까요? 여기에는 옳은 부분도 있고 너무 지나치게 베드로를 신격화 한 부분, 곧 베드로의 후임자라 주장하는 교황과 로마 카톨릭의 세계적인 조직을 합리화 하기 위한 인간적인 요소도 매우 많습니다.
일단 저는 개인적으로 사도 베드로 선생님께서도 로마에 갔고, 그곳에서 순교를 했을 가능성도 크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베드로전서 1:1”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중략] 베드로전서 5:13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베드로의 죽음, 곧 순교에 관해서는, 요한복음 21:18 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를 우리가 기억해 볼 때, 베드로가 자신이 원래 헌신하고 또 부름받았던 “할례자들을 위한 사도” (갈라디아서2: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로서 예루살렘이나 유대지역에서만 주로 사역을 했던 것이 “아니라” 갈릴리 호숫가에서 베드로를 회복시키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예언)대로, 베드로는 수리아의 안디옥교회와 다른 이방인 지역, 그리고 종내에는 당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바벨론”이라고 종종 불리웠던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까지도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의 유대인 성도들을 돌보다가 때가 되매 순교까지 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이번에 저는 여러 관련 성경말씀과 서적들을 통해 새로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로마행 시기
사도행전의 저자요 사도바울과 함께 처음 로마에 갔던 닥터 누가는, 사도 바울이 이태 (만 2년) 동안 로마에서 미결수로 머물며 자유롭게 셋집에서 유대인들과 유력한 현지인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사도 베드로가 그 로마에 와 있었다는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위에 인용한 베드로전서 1장1-2절과 5장 13절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이 편지 베드로 전서를 쓸 때 베드로 선생님은 바벨론, 곧 로마에 머물고 있으며, 그 로마 교회 성도들 곧,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 곧 당시 유대를 떠나 소아시아 각처에 흩어져 있던 디아스포라 유대인 성도들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 (마가 요한)”도 그리하느니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께서 이 베드로전서를 로마에서 기록한 시기는 주후 62년 이후, 그러니까 바울 사도께서 로마에서 첫 2년 사역 후 재판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다시 스페인으로 혹은 소아시아로 재방문 선교를 떠난 뒤가 된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께서 첫 2년간 로마에 죄수의 신분으로 머물 때 쓴 편지 (목회서신) 골로새서 4: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와 빌레몬서 23, 24절2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를 참고하면, 마가 요한이 바울 선생님의 첫 로마 사역 2년을 동역자로서 돕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 곧 바나바 사도의 누님 (혹은 여동생)이었던 마리아 (사도행전 12:12)의 아들이며, 그의 이름이 로마식 이름 (마가, 마르쿠스)와 헬라식 이름 (요한)인 것에서 보듯이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으나 아버지는 로마인 이었으며, 당시 로마와 이탈리아 본토에서는 우세하게 사용되던 라틴어 (로마언어)를 잘 하였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봅니다. 한 때 바울 사도와 외삼촌 바나바를 따라 제1차 선교여행에 나섰다가 지중해를 가로지르는 돛단배 여행에 지쳐 (!) 선교단에서 무단이탈한 실패의 경험과 그로인해 2차 선교여행 출발 시에는 바울로부터 제외를 당했던 청년 마가 요한. 그는 실패자요 낙오자요 불합격 판정을 받은 자였으나, 감사하게도 외삼촌 바나바 (‘위로자의 아들, 격려자’란 뜻)를 따라 바나바(그리고 마가 요한 어머니 아버지)의 고향 구브로 섬을 향해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고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와 바나바의 제자훈련 (on-the-job training)에 의해 신실하고 유익한 일꾼, 당시의 “차세대 리더”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마가요한이 사도 바울 선생님의 로마 도착 후 처음 2년 사역에 핵심적인 선교단원으로 사역하던 중, 사도 바울 선생님이 스페인 혹은 소아시아 재방문 여정을 떠나실 때는 누가와 함께 로마에 남겨두었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떠난 뒤 어느 시점에 로마에 도착한 사도 베드로의 서신 속에 “내 아들 마가도” 흩어진 디아스포라 성도들에게 문안한다고 소개하는데, 베드로 사도에게도 마가 요한은 아들처럼 소중하고 요긴한 동역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많은 성경 학자들은 이때부터 마가 요한이 베드로의 순교의 시점까지 베드로를 도와 (특히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로마교회 사역을 감당하였으며, 베드로와의 동고동락을 통해서 주 예수님과 함께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사도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모든 자세한 이야기들을 전해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4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였고 가장 우선권을 갖는 [마가복음]입니다. 할렐루야!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 도미네, 쿼 바디스?” 그리고 베드로의 순교
사도 베드로의 로마 사역과 순교에 관한 전설은 원래 주후 2세기 경에 쓰여진 신약 성경 외경New Testament apocrypha 책들 가운데 하나인 “베드로 행전Acts of Peter” 이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서 비롯되는데, 정통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이 베드로 행전의 전설이 세상에 폭넓게 전파되고 거의 정설로 자리잡도록 영향을 끼친 책이 바로 폴란드의 역사학자 센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가 써서 1905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소설 <쿼 바디스>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읽고 엄청난 감동을 받았는데요, 그 내용 가운데는 지금도 사도 베드로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압비아 가도를 따라 로마를 벗어나다가 맞은 편에서 오히려 로마를 향해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 묘사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방문했던 카타콤 바로 옆으로 압비아 가도가 통과하는데 (사진 참조), 바로 그 카타콤에서 완만한 언덕길을 따라 1.200미터 정도 가면 내리막 길이 시작될 즈음에 사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바로 그 지점이 있고 그곳에는 어김없이 로마 카톨릭 성당이 “도미네, 쿼바디스 교회”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있었습니다. 전설 (베드로 행전)에 의하면, 그곳에서 예수님을 (환상중에) 다시 만난 베드로는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번 연속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고, 다시 세 번 “내 양을 치라 (먹이라)!” 당부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고 돌아서서 그 언덕길을 다시 내려가 로마 시내로 향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성도들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힐 때, “나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똑바로 박힐 자격조차 없으니 거꾸로 못박아달라!” 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21:18 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21: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가 우리로 하여금 베드로의 로마에서의 사역과 순교에 관한 전설을 어렵지 않게 상상하며 용납하도록 해 주는 것이지요.
베드로의 순교 시기
사도 베드로의 순교 시기에 관해도 여러 견해들이 있는데, 저는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주후 64년 이후로 봅니다. 우선 네로 황제가 제위 기간 (주후 54-68년) 중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로마에 대화제가 발생한 주후 6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고, 네로 황제가 68년에 30세로 죽을 때까지 기독교인들에 대한 큰 박해가 이어집니다. 사도 베드로 선생님의 나이가 예수님보다 약 5년 정도 더했다고 볼 때, 전설대로 그가 주후 66-68년 경에 순교를 당했다면 그의 나이는 70-75세 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순교시기와는 약간의 간격을 둔 시기일 수도 있지만 두 분이 동시에 순교를 당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위대한 두 사도들에게 순교의 특권을 허락하시고 그들의 죽음을 통하여서도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위로와 격려와 새로운 각오를 다지도록 빈틈없는 시간차와 죽음의 장소와 과정을 인도하시고 허락하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번 연재의 마지막이 될 다음 이야기는 포로 로마노 (로마 광장)와 콜로세움, 그리고 바티칸 박물관에 관해 나누겠습니다.]
